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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수록(夜譚隨錄) 번역

[권1] 11. 소중분(蘇仲芬)

by 까오싱 라오스 202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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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太學) 소괴(蘇桂)는 자가 중분(仲芬)이었다. 과거를 준비하며 도성에 올라와 왕() 급간(給諫)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왕은 양가원(梁家園) 근처에 살았는데, 그곳은 성 밖이어서 지극히 외지고 황폐했다. 왕은 거처가 시장과 가까워 문 앞이 복잡한 것을 걱정하여, 제자들을 따로 거처하게 할 몇 칸짜리 집을 따로 구하려 했다.

마침 인가가 모인 곳에 빈집 한 채가 있었는데, 팔기 위해 자물쇠를 채워둔 상태였고 거리 하나만 두고 떨어져 있었다. 왕은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마음에 들어 하여 백금으로 집 문서를 바꾸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오물을 치우며 벽에 회칠하고 창문에 종이를 바르는 데에 또 수십 금이 들었으나, 마침내 집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왕은 중분과 하인 하나, 동자 하나를 그곳에 살게 했다. 왕의 자제들이 아침저녁으로 와서 중분에게 강론을 들었기에 주인과 손님 모두에게 매우 편리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집이 원래 흉가라는 말을 하자, 중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귀신 따위 믿지 않습니다. 귀신이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괜한 말로 사람 마음만 어지럽힐 뿐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들이 점차 일어났다. 하루는 날이 저물 무렵, 하인이 시장에서 술을 사서 돌아오는데, 등이 굽은 노파 하나가 눈을 붉힌 채 펑펑 울며 부엌 쪽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손짓하며 부르려는데 금세 자취를 감췄다. 또 하루는 한 노인이 부드러운 챙이 달린 흰 양모 모자를 쓰고 마당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손을 등 뒤로 하고 달을 바라보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키가 겨우 세 자(, 90cm)에 불과했다. 하인이 크게 소리치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동자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러나 중분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오히려 전부 헛소리라고 꾸짖었다.

마침 향시(鄕試)가 있어, 중분은 하인을 데리고 국자감(國子監)에서 과목을 점검하러 갔으며, 사나흘쯤 성 밖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집에는 동자 하나만 남겨두었다. 당시 칠월이라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 동자는 문을 열어둔 채 문 앞에서 깊이 잠들었다. 한밤중, 막 잠에서 깬 동자는 마당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들었다. 털이 곤두서고 겁에 질린 나머지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린 채 한쪽 귀만 바깥으로 내어 소리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벽 너머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중 몇 마디는 또렷이 들렸다.

술 다 익었네. 난 오늘 밤에 이 하녀 일까지 하려던 게 아닌데, 아버지까지 밤중에 이리 뛰어다니게 하네. 아까 나랑 십일매(十一妹)가 소변보러 나갔을 때, 하녀가 입 벌리고 숨 몰아쉬더니 엉덩이를 머리보다 더 높이 들고 있더라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달걀을 사러 시장에 갔다가 사회자(沙回子)네 집 사나운 개한테 쫓기는 바람에 당황해서 그러고 있었대. 십일매는 정이 너무 깊은 게 탈이야.”

그 후로도 실없는 웃음이 계속되었다.

우리 집 아련(阿連)도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 하녀랑 한바탕 할 걸.”

곧이어 여럿이 함께 웃는 소리가 났다. 또 한 여자가 웃으면서 욕하듯 말했다.

음탕한 하녀야, 너무 까불지 마. 내일 두 한림(翰林)께서 오시는데, 또 그렇게 재잘거리면 우리가 돈 모아서 사과해야 할지도 몰라!”

그 뒤로 또 누군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목소리가 제비 지저귀듯 맑고 카랑카랑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말소리가 점점 흐려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새벽닭이 울 무렵이 되어서야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동자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공포에 질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튿날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일을 이야기했다.

왕의 조카들은 모두 젊은 호사가들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거짓으로 부탁했다. “소 선생이 성안으로 들어오시는 바람에 숙소에는 어린 종 하나만 남았습니다. 선생께서 저희 형제들에게 잠시 그곳에 머물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부탁하였기에, 허락을 구합니다.” 급사는 이를 허락했다. 두 젊은이는 기뻐하며 이부자리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잠자리에 들었으나, 새벽까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음 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소 선생이 성을 나가자 두 젊은이는 그곳에서 물러났다. 둘은 괴이한 이야기가 전부 거짓말이라며 함께 비웃고는 다시는 믿지 않았다.

이틀 후, 중분은 밤에 더위가 심해 일어나 평상에 앉았다. 멍하니 있는데 창호지 너머로 한 사람이 뜰 안을 걸어 다니는 게 보였다. 어린 종이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자가 이윽고 천천히 섬돌 가까이 다가와 달빛 아래 서성였다. 머리에 가발을 쓴 듯한 모습이 마치 벌이 창문에 다가드는 것 같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가벼운 비단옷을 입고 높은 신발을 신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풍만한 자태가 하늘하늘하여 혼을 빼앗을 만했다. 이어서 몸을 돌려 흘끗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인간 세상의 게 아니었다. 중분은 눈앞이 아찔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치 말이 달리고 원숭이가 쫓는 듯 마음이 어지러워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여인은 창문을 흘겨보며 웃으며 말했다. “무슨 글쟁이가 저녁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감히 남의 집 규수를 엿보십니까?” 중분이 대답했다. “벌과 나비가 만약 꽃의 향기가 없다면, 어찌 그리 날뛰겠습니까? 당신이 오랫동안 저의 종들을 괴롭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뵙게 되었군요. 어찌 작은 방으로 들어와 옥 같은 얼굴을 잠시 보여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리해주신다면 비록 이 서생이 죽더라도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인은 대답 없이 코웃음을 치며 방 안으로 부드럽게 걸어 들어왔다. 가을 물결처럼 빛나는 눈은 애교스럽고 가련하여, 서시(西施)나 남위(南威)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었다. 중분은 평상에 앉아 그녀에게 절하고, 얼음물을 만들고 수박을 쪼개어 내밀었다. 여인은 연꽃 색깔의 얇은 비단 저고리를 입었는데, 마치 옅은 안개가 꽃을 감싼 듯 옥 같은 피부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푸른 비단 치마 아래로는 하얀 발이 살짝 보였다. 등불을 가까이 대고 보니, 맨발에 붉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중분이 농담으로 말을 걸었다. “옛날에 맨발의 하녀가 있었다는데, 당신이 혹시 그 후손입니까?” 여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신발 위 발은 서리처럼 희고, 검정 비단 버선을 신지 않았지요. 옛날 미인들이 발을 묶기 전에는, 누가 저보다 못했을까요. 당신이 보지 못했을 뿐이죠.” 중분은 장난으로 그녀의 발 하나를 잡아 자세히 살펴보니, 발등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발바닥은 평평하고 발가락은 가지런했고, 길이는 여섯 치 정도였으며, 코를 찌르는 야릇한 향기가 났다. 마음이 크게 흔들린 중분은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고, 여인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둘은 마침내 서로 꼭 붙어 밤새도록 정을 나누었고, 닭이 울 때야 비로소 일어났다.

이후 여자는 밤마다 찾아왔다. 그녀는 성이 화() 씨이고, 대대로 농서(隴西) 사람이며, 순천(順天)으로 이사 온 지 두 대째라고 말했다. 집 뒤 양가(梁家)의 정원이 자신의 옛집이라고 했다. 중분과는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찾아왔다고도 했다. 중분이 말했다. “참으로 우연이 아니군요. 다만 성인의 도는 천하를 한 몸처럼 여기는 것이므로, 만물이 함께 자라나면서도 서로 해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이치를 깨달은 지 오래입니다. 당신은 여우입니까, 귀신입니까? 부디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선녀입니다. 어찌하여 여우나 귀신으로 의심하십니까?” 중분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선서(仙書)에서 듣기로는 죽지 않는 사람은 곡기를 끊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보통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심지어 고기와 술도 가리지 않으니, 선녀가 정말 맞습니까?” 여인은 비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융통성 없이 고집하는 자를 책벌레라고 하더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이 책으로 따져 물으니, 저 또한 책으로 해명하겠습니다. 신선전(神仙傳)과 같은 기록은 보지 못했나요? 용의 간이나 기린의 육포는 오직 신선만이 먹고, 옥례(玉醴)나 금장(金漿)은 오직 신선만이 마시며, 그 외에도 천 년 된 복숭아, 만 년 된 연뿌리, 백 섬이나 되는 술, 봉황의 골수, 그리고 교리(交梨)나 화조(火棗), 귤즙이나 하상(霞觴) , 이러한 종류는 시와 서적에 흩어져 기록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신선들이 먹지 않는 음식이 있을까요? 그런데 당신은 말이 지나쳐요. 만약 음식을 먹지 않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요? 누에는 먹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는데 봄이 다 가면 죽고, 매미가 마시기만 하고 먹지 않는데 가을이면 말라 죽고, 하루살이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데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어요. 이들은 신선이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중분은 말문이 막혔으나, 다만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은 억지로 말을 만들어 이치에 맞추려 하니,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선녀라고 칭했으니 묻겠소만, 제가 듣기로 선녀는 미래의 일을 안다고 하더이다. 당신이 보기에 제가 이번 과거에 합격자 명단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말했다. “당신은 재능이 변변치 못하면서 기운만 드높아요. 매번 가벼운 친구들과 어울려 농담을 주고받으려 하니, 그런 태도는 매우 불리해요. 사람은 자기 잘못은 숨기고 좋은 점을 드러내야 하며, 현재의 선행과 공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해요. 어찌 하찮은 말재주를 뽐내고 순박하고 말이 어눌함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오직 교묘함만을 드러내려 하나요? 가벼운 농담으로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워요. 만약 당신이 이 태도를 고집한다면, 이번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지금이라도 새롭게 시작한다면, 작은 성공은 거둘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굶어 죽은 채로 끝나겠죠.” 중분은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재처럼 변하고 마음이 죽은 듯하여, 두려워하며 다시 절하고 말했다. “당신의 말씀이 뼈에 사무치니, 감히 활시위와 화살처럼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여인은 떠났고, 몇 달이 지나도록 다시 오지 않았다.

과거시험이 끝났다. 중분의 글은 매우 훌륭하여, 동료들은 모두 그가 오등 안에 들 것이라 단정했다. 그러나 막상 합격자 발표가 나자, 그는 낙방하고 말았다. 여인이 찾아오자, 중분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여인은 여러 번 위로하며 그를 타이르다 돌아갔다. 여러 동향 사람 중에 경박한 자들이 있어, 도연정(陶然亭)에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중분은 술에 취해 실수를 연발하며, 불교의 인과응보 설법까지 섞어 말했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니, 여인이 이미 방에 있었다. 그녀는 엄한 표정으로 그를 꾸짖었다. “성인의 말씀을 어찌하여 모욕하나요? 죄가 크군요! 당신은 마치 바람 빠진 오줌통 같아, 조금의 굳건함도 없으니, 그야말로 썩은 흙으로 쌓은 담이라 덧칠할 수도 없는 존재예요. 내가 당신과 함께하려 한들 무엇을 바라겠어요?” 말을 마치고, 여인은 분한 듯이 방을 나갔다. 중분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꿇어앉아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으나, 여인은 매몰차게 가버렸다. 떠날 때 옷 한 벌을 남겨두었는데, 중분은 처음에는 그것을 봉하여 감추었으나, 오래되어 문인들에게 조금씩 새어나갔다. 그들이 그 옷을 보고자 하여 보니, 얇기가 매미 날개 같았고, 무게는 겨우 여섯 주()였다.

훗날 왕의 조카들이 함께 관각(館閣)에 들어가니, ‘두 한림(二翰林)’이라는 말이 비로소 증명되었다. 중분은 연이어 과거에 낙방하여, 한 번도 천거되지 못했다. 그는 여인을 더욱 그리워하며 답답한 마음에 허공에 글씨를 쓰곤 했다. 또 한 해가 지나, 마침내 가난과 병으로 서울에서 객사했다. 그의 관은 공동묘지에 임시로 안치되어, 아직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있다. 이고어(李高魚)는 중분과 어릴 적 친구로, 그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때때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회상하며 들려주었다. 여인의 옷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니, 이미 급간의 손에 들어가 그가 가지고 강남으로 갔다고 했다.

 

한재(閒齋)가 말한다.

중분이 겪은 일을 보고 어떤 이는 귀신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여우가 분명하다.

 

은무선(恩茂先)이 말한다.

여우든 귀신이든 간에, 중분은 유건(儒巾)에 유복(儒服)을 갖추고 스승의 본보기가 될 만한 자였으니, 저 여인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난암(蘭岩)이 말했다.

경박한 입은 여우에게도 버림받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하물며 그 말을 듣고 거듭 절을 한 후에도, 다시 스스로 단속하지 못하고 신성한 존재를 모독하였으니, 이는 스스로 죄를 자초한 것이다. 글을 읽는 자는 가히 이로써 경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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