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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수록(夜譚隨錄) 번역

[권1] 12. 홍고낭(紅姑娘)

by 까오싱 라오스 202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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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의 적루(敵樓)는 안팎으로 모두 쉰 곳이었는데, 그 규모는 높고 깊어 여우나 쥐가 자주 깃들었다. 내성(內城)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각루(角樓) 안에도 여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여자로 변해 붉은 웃옷에 비취색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쯤 되어 보였고,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자주 그녀를 목격했다. 모두가 사람이 아님을 알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미혹되었다. 그녀가 붉은 옷을 입었기에 다들 ‘홍고낭(紅姑娘)’이라 불렀다.

때로는 경박한 젊은이들이 달 밝은 밤에 술김에 색욕이 일어나, 누각 아래로 가서 저질스러운 말로 유혹하곤 했다. 그러면 누각 위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게 멋대로 굴지 마세요.”

그 후 집으로 돌아가면 머리가 깨질 듯 아프거나, 입술이 복숭아처럼 부어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반드시 눈물로 용서를 빌고 잘못을 뉘우쳐야만 겨우 나아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했고, 감히 희롱하는 이가 없었다.

보병 장교 혁색(赫色)은 예순이 넘은 인물이었다. 어느 날 밤, 성에 올라가 당직을 서며 외롭게 초소에 앉으니, 술이 그리워졌다. 삼경(三更, 자정 무렵)이 지났을 무렵, 문밖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급히 “누구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곱고 아름다운 처녀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녀의 옷이 오색찬란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자세히 보니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뒤에는 쌍환(雙鬟, 두 가닥으로 틀어 올린 머리 모양) 머리를 한 시녀 둘이 술 항아리를 받든 채 달빛 아래에 서 있었다.

혁색은 원래 담이 큰 사람이었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그는 곧 여우임을 깨달았다. 그는 어찌 이 깊은 밤에 높은 성에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여자가 대답했다.

“저는 홍(洪)씨 집 셋째예요. 어르신이 술이 그리운 줄 알고 집에서 빚은 술을 가져왔어요.”

혁색은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방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녀가 가져온 술과 안주로 급히 손님을 대접했다. 술에 취한 그가 기분이 좋아져서 물었다.

“삼낭자, 바라는 게 있소?”

여자가 말했다.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이유는 모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어르신은 가난하고 병이 있는 데다 연세도 많으신데, 제가 무엇을 바랄 수 있겠어요? 제가 가까이 다가온 까닭은 어르신께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에요.”

혁색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여자가 말했다.

“어르신께서 송정(松亭)에서 몸값을 치르고 아이를 산 일을 잊으셨나요?”

혁색은 크게 깨달아 한참을 감탄했다. 그리고 그녀를 의붓딸로 삼았다.

그 뒤로는 당번이 있는 날이면, 혁색은 갖은 방법으로 동료들을 흩어 놓고는 홀로 지팡이를 짚고 각루 아래로 간 다음 말했다.

“삼낭자에 전한다. 오늘은 내가 당직이다.”

밤이 되면 과연 여자가 나타났다. 시녀 두 명도 함께 술과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 펼쳐졌다. 혁색은 밤마다 그녀와 함께 음식을 즐겼다.

그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바라기만 하면 미처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여자가 이미 알아차리고 단박에 마련해주었다. 혁색이 옥고리를 선물로 주자 여자는 두 번 절하며 받더니 열 겹 궤짝에 감춰 보관했다. 여자와 말을 주고받다가 혁색은 스스로 돌아보았다. 백발의 노인이 살날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선 앞으로도 서른 해는 더 사실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기를 다스리는 수련법을 전해주었다. 그가 시험해 보니 효험이 꽤 있었다.

여자는 특별히 기이한 면은 없었고, 다만 얼굴 꾸미기를 매우 좋아했다. 하룻밤에도 네다섯 번씩 화장을 고쳤다. 혁색의 둘째 아들이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집에는 술잔과 접시가 모자라 시장에서 빌려 오려 했다.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그럴 것 없어요. 제가 아버지를 위해 빌려올게요.”

약속한 날이 되자, 과연 금은으로 된 그릇이 가득 방 안에 놓여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혁색이 사실대로 말해주자 모두 기뻐했다. 혼례를 치르고 나자 그릇들이 전부 사라졌다. 혁색의 둘째 아들은 호군(護軍)이었는데, 여자의 미모를 전해 듣고는 몰래 성루로 올라가 그 아버지가 당직 중인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혁색 홀로 중얼거리며 웃고, 혼자 술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혁색이 자랑하려고 옥 술잔을 숨겨 집에 돌아오자 사라졌다. 급전이 필요할 때면 여자가 거금을 내밀었다. 모두 주제은(朱提銀)이었다.

이러기를 십여 년이나 이어졌다. 어느 날 밤,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말했다.

“인연이 다했어요. 이제 영원히 이별이에요.”

혁색이 놀라 물었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경(五更, 새벽 무렵)이 되어 여자는 흐느끼며 사라졌다. 혁색은 가슴이 아렸지만, 그녀가 왜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집금오(執金吾, 수도 치안을 담당하는 관직)가 혁색이 나이가 많다 하여 조정에 청을 올려, 그에게 물러나 쉬게 하였다. 그제야 혁색은 여자의 말뜻을 깨닫고 탄식했다.

그보다 앞서 혁색이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초병대(驍騎校)로서 갈단(葛爾丹)을 토벌하는 군에 참전했다가 승전 후 송정(松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검은 여우 한 마리를 잡았다. 동료들은 그 가죽을 벗기기 위해 죽이려 했지만, 여우는 혁색을 향해 애처롭게 울었다. 혁색은 마음이 움직여 금 두 냥을 주고 여우를 사서 풀어주었다. 그 일이 이미 삼십 년 전 일이었다. 뜻밖에도 그 일이 이렇게 보답받을 줄은 몰랐다. 훗날 혁색은 아흔이 넘도록 살았고,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여우 또한 자취를 감추었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란암(蘭岩)이 말한다.

여우는 사람이 아닌 다른 종족이면서도, 은혜를 갚고 덕을 보답할 줄 알며, 절개를 지키고 조용히 살아가기를 택했다. 사람을 홀려 해를 끼치는 일조차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키가 일곱 자나 되는 사람 몸을 가지고도,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며 웃고, 남에게 빌붙어 구걸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바른길을 지키고 아첨하지 않는 사람은 무능하다 욕하고, 스스로 세상을 아는 똑똑한 인재라 여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아, 한탄스러운 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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